옛날 정치인들 사진들 정리

2026. 1. 9. 15:44나밤 추억

김대중

(위) 87년 가택연금 중인 金大中씨가 동교동 담장을 사이에 두고 외신기자 회견을 하고 있다.
(아래) 90년 金大中 평민당 총재가 서울 연희동 우정스포츠센터에서 수영을 하고 있다.

김덕룡 김대중

(위) 청 셔츠를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金장관 (김덕룡님으로 추정됨 아니면 댓글좀)
(아래) 71년 대통령 선거 후보로 나설 당시의 金大中씨

이한동 이회창

(위)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李漢東 신한국당 고문
(아래) 58년 공군 법무관 시절의 모습 

이회창 옹은 진짜 정말 잘생기셨다. 정치인들이 보통 인물이 수려한 경우가 많긴 하지만 이회창 옹 같은 경우에는 규격외인듯.

김종필 김영삼

87년 신민주공화당 총재 시절 피아노를 치며 생각에 잠겨 있는 金種必 총재
72년 한 행사장에서 활시위를 힘껏 당기고 있는 金種必씨.
90년 민자당 최고위원 시절 외아들 金進씨가 서울 신당동 성당에서 과테말라 태생인 마로킨孃과 혼례를 올린 뒤 金泳三 대표 부부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金種必씨 부부. 사진 왼쪽은 부인 朴榮玉여사.

사진으로 본 大選走者 8人의 발자취 이홍구

젊은 시절의 李洪九

왼 오 이미지 보여주고싶어서 한번에 찍은 것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한 역대 대통령들 김영삼 노태우

14대 大選에 나선 무소속 金玉仙 후보의 서울 청량리역 앞 유세(1992년 12월).
14대 大選에서 치열한 3파전을 벌이던 통일국민당 鄭周永 후보가, 선거를 나흘 앞둔 시점에서 대통령 후보를 사퇴하고 국민당에 입당한 李種贊씨와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1992년 12월 14일, 부산 사직 운동장)

민중의 대표를 표방하여 13, 14대에 연속 출마한 무소속 白基玩 후보 (제 14대 大選 1992년 12월)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종필

취임식 다음날 盧泰愚 대통령 내외가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국종합전시장에서 民正黨 주관으로 개최된 대통령 취임 축하연회 보통사람들의 밤에 참석했다.
13대 대통령 선거의 최대 쟁점중의 하나는 야권의 후보 단일화 문제였다. 金大中씨가 통일민주당을 탈당 평화민주당을 창당하면서 빚어진 兩金의 대립은 선거 막판까지 논점이 되었다. 한국 가톨릭 농민회 회장단이 후보단일화를 요구하는 농성을 벌이며 삭발을 하고 있다. (1987년 11월)
신민주공화당 金種必 후보의 인천 신흥초등학교 유세(제13대 大選 1987년 12월 13일).

김영삼 노태우

통일 민주당 金泳三 후보가 부산 수영만에서 열린 軍政 종식을 위한 국민대회 에서 군중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제13대 大選, 1987년 10월)
민주정의당 盧泰愚 후보의 천안 유세. 천안역 광장에서 4만여명의 인파가 모였다.(제13대 大選, 1987년 11월)

제7대 박정희 대통령 각하 취임

제7대 朴正熙 대통령 취임 경축 현수막. 이 선거에서 朴 대통령은 신민당 金大中 후보에게 선승했고 이것이 이듬해 유신을 단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건 제가 스캔을 좀 구리게 했는데 실제로 보면 좀 느낌 있게 폭죽 터지는 사진입니다.

박정희 김대중

제7대 대통령 선거에 나선 공화당 朴正熙 후보 부부의 대구 유세(1971년 4월 17일)
연설 순서를 기다리는 金大中 후보가 당시 신민당 金守漢 대변인으로부터 뭔가 보고를 받고 있다. (제7대 大選. 1971년 4월)

박정희 김대중

1967년 제 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공화당 朴正熙 후보의 대구 수성천변 유세.
안동지역 유세에 나선 金大中 후보 (제7대 大選 1971년 4월)
자신에 찬 모습의 40대 기수 金大中 후보 (제7대 大選, 1971년 4월)

박정희

71년 大選 직후 조선일보 정문 앞에 임시로 마련된 개표 속보판.

公約보다는 막걸리 유권자들은 후보의 연설을 듣는 한편 유세장 한켠에 마련된 술판에 모여들어 목을 축이기도 했다. (제6대 大選 1967년 5월)

이때 정치는 낭만이 가득했던듯 싶다.

5·16 훠 2년 6개월 동안의 군정이 끝나고 1963년 10월, 개정 헌법에 의하여 실시된 제5대 대통령 선거. 황소를 내세워 일꾼의 이미지를 강조한 朴正熙 對 군정 종식을 내건 尹潽善의 2파전 양상이었지만 선거 3주 전 尹潽善에 의해 제기된 朴政熙의 전력 문제가 가장 민감한 쟁점이 되었다.

6번 박정희 민주공화당
이승만

1.1960년 3월 15일 밤. 민주당 중앙당 본부 앞에는 수많은 당원과 시민이 몰려들어 민주당 지도부의 3·15 選擧는 不法 無效 宣言을 경청했다.
2. 李承晩의 네 번째 대통령 도전을 환영하는 예술인 대회, 많은 국민들이 李대통령의 4選 출마에 비판적 시각을 보이고 있던 상황에서, 이같은 관제 행사는 연일 계속되었고 결국 3·15 부정선거로까지 치닫게 된다. (1960년 3월)
3. 1960년 3월 15일, 투표를 하고 나오는 李承晩

김덕룡 김영삼

젊은 시절 가족과 함께 한 모습 (뒷줄 가운데가 金 장관)
야당 시절의 金泳三 대통령과 함께.

김덕룡

朴燦種 고문의 가족사진
학창시절의 金德龍